지민 설현 안중근 몰랐다는데 그는 누구인가...
얼마전 '채널 aoa'에서 설현과 지민이 안중근 의사를 두고 긴또깡(김두한을 일본식으로 발음한 것)이라고 하여 구설수에 올랐습니다. 물론 안중근 의사를 모를 수도 있습니다. 요즘은 잘 모르겠으나 재가 고등학교를 다닐 때만 하더라도 한국사는 국사라는 이름으로 아이들에게 교육되어졌는데 이 또한 고등학교 2학년부터는 문과아이들에게만 교육이 된 터라 저도 국사를 많이 모르거든요. 물론 안중근 의사는 누군지 압니다. 일본을 조금 좋게 바라보고 있는 입장이 아닌지라...
그런데 문제는 설현 그리고 지민이 안중근 의사를 김두한인 것 같다는 말만 하였더라도 괜찮았을 것인데 긴또깡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긴또깡은 옛날에 야인시대를 보신 분들이라면 잘 아실겁니다. 이것은 일본식 발음으로 한국어로 지칭한 것이 아닙니다. 아마도 많은 분들이 다른 것은 어떻게 넘어가더라도 여기에서 문제가 있음을 느꼈을 것입니다.
설현 지민 안중근을 몰랐다!
더군다나 AOA 설현은 현재 한국방문위원회의 홍보대사를 맡고 있기도 합니다. 즉 외국인에게 있어서 한국을 대표하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런 분이 안중근 의사를 몰라보고 긴또깡이라니 문제가 없다고 보는게 더 이상해 보이는데요. 그럼에도 한국방문위원회는 설현을 다른 사람으로 교체할 계획은 없다고 밝히기도 하였습니다. 아마도 홍보대사가 재능기부의 형식으로 맡게 되는 것이다보니 자기들도 어떻게 당당히 말할 상황이 아니라서 그런가 싶었습니다.
설현 한국방문위원회 홍보대사
저도 뭐 딱히 설현과 지민이 죽을만큼 잘못한 것이라고 보고있지는 않습니다. 저도 안중근, 유관순, 홍범도와 같은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들만을 알지 그리 유명하지 않으신 분들은 한명도 모르거든요. 다만 이번 실수를 통하여 지금의 학생들이라고 한국사교육을 강화하였으면은 하는 바램이 있을 뿐입니다. 솔직히 사람이 살면서 이정도 실수는 할수도 있는 것이고 더군다나 프로그램에는 대본이라는게 있지 않습니까? 설현도 이와 같은 것들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을 뿐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번에 설현과 지민이 몰라서 심히 당황하였을 안중근 의사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먼저 크게 보면 안중근 의사는 계몽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안중근은 1879년 9월 2일에 태어나 원래는 민족의 계몽을 위해서 발벗고 나선 인물입니다. 안중근의 아버지 안태훈이 개화파 그룹에 적극적인 인물이었는데 그에게도 많은 영향을 받았을 것입니다.
지민 : 이 분(안중근) 누구셔?
이처럼 그는 아버지를 잘 따르는 모습이었습니다. 그가 아직 미성년자일때 그러니 1894년 동학 농민 운동이 일어나자 그는 아버지와 함께 동학 농민군을 토벌하며 놀라운 리더쉽을 보이기도 하였습니다. 이 때의 전투가 바로 박석골전투입니다.
김두한이 아니고? 긴또깡이라고 말하는 지민
이렇게 화끈한 청소년기를 보낸 안중근은 1895년 천주교학교에 입학을 하여 프랑스어와 신학 등 쉽게 접하기 힘든 공부를 하였으며 1904년에 들어서는 석탄 장사를 시작하였지만 성공하진 모했습니다. 후 1905년 일본이 한국과 을사늑약을 맺음으로 사실상 국권침탈을 하였다는 소식을 접하고선 독립운동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는 일전에 민족이 지식으로 무장해야 뜻을 이룰 수 있다는 생각이 있어서 였는지 삼흥학교를 세우고 돈의학교를 인수하여 교육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그러나 안중근은 여기에 한계를 느꼈는지 고종이 강제 퇴위당하고 군대가 강제로 해산되는 등의 문제가 있어서인지 의병이 되었으며 끝내 연해주까지 가서 활동을 하게 됩니다. 그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1909년 자신과 뜻이 맞는 11명과 함께 동의단지회를 결성하기에 이릅니다. 여기서 그는 4번째 손가락의 마디를 하나 잘라 굳은 의지를 보이기도 하였습니다.
안중근 의사의 굳은 의지 단지 서약!
이어 1909년 10월 26일 그는 하얼빈에 가게 됩니다.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기 위함이었는데요. 오전 9시가 되어 이토 히로부미가 탄 기차가 하얼빈 역에 도착을 하였고 사열을 받고 돌아서는 그에게 안중근은 총탄을 퍼부었습니다. 그리고 안중근은 근처 만인들이 알 수 있도록 러시아어로 코레아 우라(대한민국 만세)를 외치며 러시아 경찰들에게 체포되어 끌려갔습니다.
죽어서도 독립을 염원하던 안중근 의사
그 후 일본에게 넘겨진 안중근 의사는 1910년 2월 14일 사형 선고를 받았으며 거의 한달 뒤인 3월 26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마지막으로 이런 유언을 남겼다고 합니다. "내가 죽은 후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인근에 묻어두었다가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달라. 난 천국에 가서도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의무를 다하며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루도록 일러돌라.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거든 난 마땅히 춤추고 만세를 부를 것이다."